
[너는 허면, 무엇을 위하여 하늘을 움켜쥐려 했는가.]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오염된 대지와 함께 물든 보랏빛 하늘이 신기하게도 맑다. 그것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기쁨도 아니요, 그렇다고 분노도 아니다. 그 애매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마검은 못마땅해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의도도 분명치 않은, 그렇다고 단순하게 힘을 추구하는 광전사도 아닌 이 소년이 힘을 추구하는 불투명한 목적이.
[무엇이 그리도 네게 귀중했더냐. 네 살과 뼈를 깎아서라도 손에 움켜쥐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느냐.]
소년은 천천히 손을 그러쥐었다. 바짝 마른 나뭇잎이 손아귀에서 흐트러져 가루가 되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바람이 불어와 손 안의 가루들을 그러안고 재빠르게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소년은 대답이 없었다. 조용히, 처음부터 끝까지 그 가루의 끝을 지켜보았을 뿐.
[네게 무엇이 그리고 소중했는가. 나를 휘두를 때, 역으로 휘둘리지 않았던 네 안의 그것은 무엇이더냐.]
네 무엇이 그리도 특별한가. 처음 만나 힘을 쓰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주구장창 마검이 소년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은 이것이었다.
자신의 힘을 쓰는 사용자의 최후는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마검이 괜히 마검 이겠는가. 힘에 취해 저를 집어든 자들은 단시간에 몸의 주도권을 뺏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해서, 맨 처음 소년이 저를 집어들 때도 검의 생각은 한결같았다. 곧 빼앗길 가엾은 자. 헌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입이 붙기라도 했는가?]
호기심은 이제 조바심이 되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마검은 궁금했다. 아니, 그들은 궁금했다. 무엇이 소년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가에. 소년이 쥐고 있는 진짜 목적이.
“...사실 네가...너희들이 듣는다면 우습기 짝이 없는 대답일거야.”
오랜 침묵 끝에 들려온 소년의 목소리는 건조하기 짝이 없다.
아주 오래전, 하늘을 동경해 충동적으로 제 형에게 달려가 억지로 받아낸 빛바랜 약속 하나를 더듬으며.
꿈결과도 같은 찰나의 순간과 흐릿한 시야를 마주 하며 그는 자신의 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것은-”
날개
형, 기억해? 오래되고 빛바래서, 이제는 너덜너덜해진 먼 과거의 약속을.
“조심해, 꼬맹아!”
크게 휘두른 검을 따라 붉은 불길이 치솟는다. 영웅들은 뒤로 크게 도약해 소년의 공격을 피해낸다. 조금 밀려난 발을 크게 굴려 공중으로 뛰어오른 전사의 폴암이 소년을 향해 드리운다.
녹색으로 빛나는 화살과 붉게 빛나는 카르트가 한줄기의 잔상을 남기며 공간을 가르고, 용이 토해낸 불덩이와 정령의 분노가 소년을 뜨겁게 붙든다.
“데미안!”
날개를 접고 땅으로 내리 앉은 군단장을 향해 새하얀 빛줄기가 엄습한다. 소년은 실없이 웃음을 터트린다. 없는 여유를 억지로 끌어 모은 그런 류의 웃음. 앞서 영웅들이 했던 것처럼, 소년 역시 뒤를 향해 크게 도약한다.
형, 기억해? 내가 형에게 억지로 졸라서 받아낸, 하늘을 날고 싶다고 울면서 얻어낸 약속을.
다시 한번 소년의 등에서 붉은 불꽃이 타오른다. 불꽃은 소년을 감싸 안고 그를 하늘로 끌어올린다. 자줏빛으로 물든 하늘에 불꽃의 날개가 뻗어나간다. 모든 것을 잃어 이젠 더 이상 추구할 것이 없는, 텅 빈 자의 끝. 이제 잃을 것이 없는 자의 마지막 발악. 마검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검이 타오르고, 날개가 타오른다. 그리고 6개의 빛이 소년을 향해 다가온다. 둘 중 하나는 오늘 끝을 보겠지. 소년은 빠르게 빛을 향해 날아간다.
어디선가, 소년을 부르짖는 형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다.
그래서 소년은 웃었다.
내가 나일 수 있을 때 끝내.
소년은 웃었다. 참으로 쓸쓸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운 가족의 품에서.
날개2
투둑, 하고 자줏빛으로 상기된 볼을 따라 투명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한줌의 흙.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는 힘겹게 흙을 퍼 옆으로 집어 던지듯 내려놓았다. 또 다시 한줌, 한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옆에 흙이 둥근 산을 이룬다.
조금 깊어 진 듯싶은 구덩이에 데몬이 손을 집어넣는다. 갈고리로 끌어 올리듯 흙을 긁어 올리는 손은 끊임없이 부들거리며 떨려온다. 손톱 사이로 간간히 끼는 모래알이 걸리적 거린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손끝에는 점차 감각이 무뎌져 간다.
그의 뒤에 있는 나무 밑동에 쓰러지듯 기대어 있는 동생의 텅 빈 동공이 그리도 그리웠던 걸까, 채 식지 않은 온기를 보존하고 싶어 서두르는 걸까. 데몬의 손에 점차 속력이 붙었다. 벅벅 거리며 대지를 긁어대는 소리가 처절하다.
연한 손끝의 살이 거친 흙에 쓸려 붉은 핏방울을 쏟아내고, 손톱은 기어이 떨어져 나가 흙속에 모습을 감췄다. 흙에 붉은 핏방울이 묻어 갈색 흙을 검게 물들인 것이 마치 지옥에서부터 올라오는 누군가 최후의 발버둥 같다.
“...흐으.”
물기어린 코를 훌쩍이며 사내가 벅벅 얼굴을 닦아냈다. 이미 엉망진창인 손 때문에 얼굴은 구정물 투성이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구정물 위를 내달린다. 볼에 다시금 길이 난다. 그리고 다시 구정물 투성이로.
“...데미안.”
그는 몸을 돌려 제 동생을 불렀다. 하지만 대답은 없다. 당연하게도.
데미안, 이리와. 어서 오렴. 데몬은 걸음을 옮겼다. 무언가에 취한 것 마냥 걸음은 힘이 없고 이리저리 노선을 벗어나 비틀거리기 일쑤다. 힘겨이 옮기는 발걸음이 무겁다. 그대로 쓰러져 몸을 뉘이고 싶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전쟁을 끝마친 지친 병사의 모습으로, 무기를 내던지고 갑옷을 내버리며. 그리하여 마침내 다다른 최후에는 아무것도 없다. 텅 빈 무언가 외에는.
“데미안, 데미안.”
바로 그 다음 순간 그는 놀라울 만큼 엄청난 힘으로 제 동생을 끌어안아 올린다. 어렸을 적과는 비교도 하기 힘든 힘으로 동생을 안은 데몬은 몸을 돌리고, 비틀거리며 걸어 온 길을 내달리듯 걸어 제 동생을 검게 물든 대지에 뉘였다.
빛을 잃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이 이리도 가슴 아픈 일이었던가.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동생의 볼을 쓰다듬었다. 채 식지 않은 온기가 핏방울이 엉긴 손가락 끝을 타고 전해진다.
이렇게, 이렇게 따스한데.
형, 울지마. 웃어야지.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린 것 같다.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꾹 눌러 낸다. 억지로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부들거리며 떨려온다. 그러나 웃을 수는 있어도, 그 끝에 걸린 이슬을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
이것 좀 봐. 이 데이지 꽃. 어머니께서 생전에 가장 좋아하셨던 꽃이야. 너도 썩 좋아하지 않았니. 오는 길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더구나.
무채색의 손에 하얀 꽃이 피어오른다. 눈을 한번 쓸어 내려주고, 그는 잠든 동생을 위해 대지의 이불을 덮어준다.
한줌, 한줌. 그리고 또다시 한줌. 그리고 그 앞에서 그는 서툴게 엮어놓았던 나뭇가지를 들어 올린다. 바로 그 앞에, 잠들어 있는 동생의 앞에 꽂으려는 찰나에,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뭇가지를 내던지고 하늘로 박차 오른다. 날개가 펄럭이며 애매한 시간대를 넘나드는 하늘을 휘젓는다. 날카로운 공기가 이리저리 섞이며 익숙한 소음을 내고 혼돈에 휩싸인 감정을 마주하는 사내를 맞이한다.
아니야, 이건 아니다. 그는 이대로 동생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소리 없는 울부짖음. 그리고 그 후에 터져 나오는 비명에 가까운 절규가 발작적으로 날개를 움직인다.
길다, 노을빛은 오늘따라 길다. 그는 끊임없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마치 그 위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리 날다 보면, 그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것처럼. 그럴 리가 없지. 그래서 그는 상승하기를 멈추었다. 멈춰선 그 눈동자에 노을녘이 가득 들어찬다.
얘야, 날개를 가지고 싶다고 했었니, 날개를 가지고 어디론가로 날아가고 싶었겠지. 하늘을 날고 싶었겠지. 하지만,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이니. 날개가 있어봤자 무슨 소용이니, 진정으로 가고 싶은 곳엔 갈수 없는데. 참 모순적이야. 쓸모도 없는 날개.
그는 날개짓을 멈추었다. 그는 이렇게 하늘을 나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내 동생. 너는 어디에 있니.
그는 하늘에 그대로 못 박힌 것처럼 멈춰서 있다. 이제 저물어가기 시작하는 그 최후의 반짝임을 마주하며, 데몬은 눈을 감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떨어진다.
추락한다.
본디 하늘을 나는 것은 추락하기 위해 나는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
@alysha971,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