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곳은 순수하되 어느 곳은 심연과 같은 모양새. 그리고 그 중간의 것들과 함께 '색'은 단순히 밝고 어두움으로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그 외에는 없었다. 데몬에게는. 태어날 적 부터 였으니 그리 이상하지도 않았다. 마스테리아의 외딴 곳에 위치한 집이어서 부모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접촉하지도 않았고, 구태여 '색'에 대해 가르치려 들지 않았기에 데몬이 보는 세상과 다른 사람이 보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은 데몬도 부모도 알지 못했다.
어느날 어머니가 마당의 작은 뜰을 가꾸고 있을 때였다. 데몬은 가만히 앉아 어머니가 정성스레 아마릴리스 씨앗을 심는 것을 바라보았다. 작업을 끝낸 어머니가 흙투성이 손으로 씨가 묻힌 부근을 톡톡,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붉은색 꽃이 필거야. 기대되지 않니, 데몬?"
"붉은색, 이요?"
'색'이 물체의 표면에 나타나는 그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데몬이 되물었다. 색에 이름이 있었구나. 모두 비슷비슷해서 잘 구분이 안되는 것들도 있었는데, 그 조그마한 차이에도 이름을 붙여주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지금까지 본 것과와는 다른 예쁜 색? 데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붉은색. 정말 예쁜 붉은색이란다. 기대해도 좋아."
그러나 몇달 뒤 피어난 꽃은 다른 무언가와도 같은 빛깔을 하고 있었다. 시무룩해진 데몬의 기색에 어머니가 의아해했다.
"색깔 예쁘지 않니?"
"이게 붉은색이에요…?"
"마음에 안 들어? 돌연변이인지 꽃잎이 약간 덜 붉긴 하지만 예쁘긴 한데…."
데몬은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어른스러운 아들의 묘한 반응에 어머니는 내심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혀올 정도의 정적, 조심스럽게 엄지를 펴 든 데몬이 석양이 내리기 시작한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거랑… 똑같잖아요."
"…? 저건 주황색이란다."
주황빛이긴 해도 아직 저녁도 먹지 않은 이른 시각이라 아마릴리스의 것과 명도가 흡사했다. 데몬은 저 정도 색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뭐든지 혼자 곧잘 하곤했다. 한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어머니가 설마하며 질문하려 했지만 곧 몹시 잔혹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는 무엇이 이상한 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아이에게 너는 색맹이다, 하고 알릴 수 있겠는가. 제 아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 괜히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던 어머니는 입 밖으로 새어나오려 하는 의문을 묵살했다. 자신의 아버지도 색맹이었다는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미안함에 몸을 떨며 어머니는 열리지 않는 입술을 열었다.
"…아마 데몬, 네가 보고 있는 색은 회색일 거란다."
그 이후로 어머니는 색맹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았다. 장작을 태우며 넘실거리는 모닥불의 빨간색은 조금 진한 회색이었고, 갓 피어난 새싹의 싱그러운 연두색은 연한 회색이었으며, 생명이 꿈틀거리는 흙의 갈색은 어두운 회색이었다.
내 아이는, 이런 세상에 갇혀 사는구나.
빛나는 무언가도 움직이는 세상도, 그저 회색의 연속일 뿐이었다.
후에 그 돌연변이 아마릴리스의 색은 더 짙어져서 진한 붉은색이 되었다.
"어머니, 저 꽃… 예전에는 다른 색이었는데 색깔이 바뀐 것 같아요. 저 꽃은 무슨 색이에요?"
데몬이 더 짙어진 꽃의 색을 인식하고 질문해온다. 다 회색이라, 붉은색이 더 깊어졌을 뿐이라는 걸 모르는 것이다.
"붉은색이야. 전에는 좀 더 옅었던 거란다."
물체의 색을 질문해오는 데몬에게는 정상인으로써의 색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레몬은 노란색이다, 정도의 개념은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어머니가 아팠다. 몇달 전부터 조금씩 불러오던 배가 원인인 모양이었다. 바빠서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아버지가 야속하리만치 그리워질 때 쯤에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병 간호에 방해될까봐 데몬은 밖으로 나와 무릎을 감싸안고 앉아서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하얬다가도 점차 어둠에 삼켜져, 마침내 점 수백개만이 자리잡고 남았다. 데몬은 그 점들이 퍽 마음에 들었다. 저 유난히 하얀 점들이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별인가 싶었다.
데몬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세상은 자신의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가 알려주시는 색은 분명 다른 색을 지칭하고 있음에도 그 이름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찰나 눈치 챘다. 그 미미한 차이 하나에도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저만이 보지 못하는 색들이 있다는 것을.
까무룩 잠들었나보다. 어둠을 천천히 내몰고, 하얀 아침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동시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방금 눈을 뜬 것이 무색하게 데몬은 달려나갔다. 연약한 아이의 뼈마디가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머니!"
데몬은 문을 부술 기세로 열어젖혔다. 기름칠한 지 오래된 나무문이 삐걱대는 소리를 흘렸다. 어머니는 지쳐보였지만 환히 웃어 보였다. 미소에도 빛이 있구나. 데몬은 괜히 웃어버렸다. 아버지가 회색의 뭉치를 데몬에게 안겨주었다. 의구심을 품으면서 받은 그것은, 수건에 싸인 아기였다. 목놓아 울던 아기는 데몬을 빤히 응시하더니 이내 울음을 멈췄다. 간헐적으로 코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얘는 형이 좋은가보네. 데몬, 네 동생이란다. 이름은 데미안이고."
"데미안…."
데몬은 낮게 그 이름을 읊조렸다. 부드러운 어감이다. 문득 데미안의 얼굴이 본 적 없는 색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어?"
고개를 들어 방 안을 둘러보았다. 갖가지 색깔이 스며들듯이 회색을 밀어내었다. 어리둥절하기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데몬은 그대로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색깔이 녹아내려 풀을, 하늘을 빚어낸다. 가끔은 원색 그대로, 또 가끔은 물이나 다른 물감을 섞어서, 세상에 붓질하는 화가의 손길 마냥 색색의 빛깔로 물들어 갔다. 팔레트에는 검은색과 흰색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색도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색들이, 있었다.
데몬의 눈동자가 풍경을 담았다. 세상은 사무치게 따스했고, 시원했으며, 순수했다. 순백의 하얀 순수함과는 달랐다. '색깔'이 있기에 순수한 세상 그대로를 볼 수 있다.
데몬은 시야를 내려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울컥 세상이 모자이크처럼 일그러져 흐릿해졌다. 데몬은 숨죽여 울었다. 그래, 이 색은 분명 어머니가 심었던 아마릴리스의 것이었다. 데미안의 눈동자는 붉었다. 유일하게 이름을 아는 색이었다.
***
몇백 년만에 깨어나서 처음 본 세상은 그 어릴 적의 것과 같은 회색이었다. 군단장이 된 이후로 줄곧 회색이었으니 그리 감흥이 샘솟지도 않는다. 여전히 검은색 필름을 통해 보는 세상이다. 어렴풋이나마 기억나는 아마릴리스의 붉은색. 누군가의 눈동자 색이었던 그 색깔. 이제 다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아아… 무척 오랜만이네요."
검은 로브와 제복을 걸친 마족으로 추정되는 자가 반갑다는 듯 즐거운 어조로 속삭였다.
"정말…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분명 즐거웠던 목소리가 어쩐지 슬프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진짜 만나고 싶었던 마냥 로브 아래로 보이는 그림자 진 얼굴에서 투명한 액체가 굴러 떨어진다.
"이렇게 다시 볼 수 있어서…"
얼핏 그와 눈이 마주친 듯 했다. 붉은 눈동자.
"너무나도 기쁘네요."
순간, 세상이 색깔로 가득 찼다.
@ATM_for_Tori, 김꿍이, 컬러버스AU